신앙과 이성을 종합한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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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위 "천사의 박사"라 칭하면서 스콜라주의의 왕자라 일컸는다. 그는 1225년 나폴리 태생, 프랑스 제이콥 성당에 묻혔고 초기 야고보 수도원 알베르쿠스 마그너스 문하에서 그리고 파리대학에서 수학 했다. 말년인 1271년 나폴리 도미니칸 대학 설립하여 신학대전 저술 중에 1274년 48세에 사망했다.
제지날드 왈, "그의 학문은 지성적인 노력에서 나왔다기 보다 기도의 힘에서 우러 나왔다"고 했다. 카톨릭의 사상의 주류인 프란시스코 수도회는 플라톤 전통의 스콜라 신학이었다면 도미니칸 수도회인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있어서 신학적 사고를 중시한 스콜라주의 신학자였다. 그의 핵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의 철학적 이성과 신학적인 신앙이 모순되지 않으며 이 둘 모두 하나님께서로 나온 원천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즉 자연의 은총을 완성케 한다는 온건한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 5차에서 십자군의 시대에 태어나서 8차 십자군 전쟁 때에 죽었다. 교황의 세속권력과 민생의 파탄이란 혼돈시대 속에서 살았다. 그는 이런 난세에 살아있는 진리를 평생 추구했다. 존재하는 것과 본질적인 것의 종합 말이다. 일체성이라 할까? 유행했던 기독교 세계관의 일관성 말이다. 존재의 실존적 문제을 기반으로 육체와 영혼, 현실과 이상 등의 분리된 갈등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즉 살아있는 것이라는 일체성 혹은 일상성의 삶에 대한 고민 말이다.
플라톤의 저 하늘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땅의 아테네 학당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중세시대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기독교적 사상으로 이해하며 중세의 상아탑을 쌓았지만 마침 십자군 전쟁의 비참함 때문인지 현실인 땅의 문제를 직시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에서 가능태를 걸쳐 완전성에 이른다는 자연의 원리를 형이상학화한 했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문제 그리고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의 진화의 착상을 아퀴나스가 현실과 신학을 결합하여 종합한 것이라 하겠다. 결국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이라는 근본문제들인 것일 뿐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각주에 불과하는 말이 맞는듯 하다.
형이상학(methaphysics)은 물질 그 다음의 문제를 다루는 사유방식이다. 형이상학은, 첫째 상승의 형이상학, 둘째, 강림의 형이상학- 하강의 형이상학인 신학이며 경험을 넘는형이상학이다. 셋째, 수평의 형이상학은 물질과 삶을 말한다. 당대 그리스인의 사고방식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수평적 세계관이었다. 그래 아퀴나스는 이 세계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의 생성 원리인 현실태와 가능태의 완전한 결합인 살아있음의 완전태- 완전성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퀴나스는 순수 가능태와 순수 현실태를 존재가 온전히 살아있을 때 완전히 결합한다. 즉 존재에서 떠난 본질은 무의미하며 존재의 순수가 모든 것을 통합한다고 보았다. 즉 감각의 경험을 넘는 본질자의 관념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땅에 살면서 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알튀세르의 유물론과 관념론의 분리와 갈등의 문제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길 "시작할 때의 오류가 끝에서는 큰 오류가 된"는 것을 아퀴나스는 "존재와 본질"에서 즉 살아있는 본질일 때에는 다투지 않는다 했다.
그래 토마스 아퀴나스는 삶의 본질과 신앙을 종합했단다. 살아있는 동안 끝임없이 묻고 답하
며 글을 쓴 것이 신학대전이다. 즉 살아있는 동안 본질에 이르려는 완전성을 추구했다는 것이 그의 삶이다. "살아있는 진리가 불안에 승리한다." 했으니 어찌보면 실존주의적 몸부림이기도 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최대 단점은 전통을 중시한 것이다. 교리의 원천은 성경의 전통, 사도들의 전통, 교회의 전통, 교회내 개교사들의 전통, 철학자들의 합리적 사상의 전통을 성경의 계시와 교회의 전통을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
예컨대 인간의 원죄에 대해선 카톨릭의 전통에 따라 믿어야 하며 배워야 한다 는 등의 것이다. 또 한편으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이성으로만 알수 없으며 특히 삼위일체나 성육신은 오직 믿음의 신앙으로만 받아들수 있다고 보았고 신존재 논증에서는 본체론적 논증이 아니라 우주론적 이해를 했다.
결국,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전통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조화시키면서 종합이라는 재해석을 시도했다. 유아세례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따랐고 예정에서는 펠라시우스파의 주장을 따른게 그렇다. 이런 면에서 계시와 이성, 성경과 전통을 중요시 했다. 이성의 긍정성을 인정하면서 이성을 초월하는 계시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완성한다고 보았다. 신학과 이성은 배제하거나 대립하지 않고 통합한 것이다. 신학은 오류가 있을수 없기에 진리를 믿음으로 수납해야 한다고 보았다.
중세의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어거스틴, 중세 카톨릭을 집대성하여 종합한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종교개혁자인 칼빈 이들은 모두 당시대적 문제들을 종합하는 달인들이었다. 다른 면에서는 당대의 문제를 재해석한 것이라 하겠다.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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