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 사람은 누구나 현실적 고민 즉 실존에 몸부림치기에 문학,철학,신학적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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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가치로 세상 이해하기
- 사람은 누구나 현실적 고민 즉 실존에 몸부림치기에 문학,철학, 신학적 주제이다.-

둘째,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무의미 혹은 인간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는 것이다”라고 규정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어떤 가치(이념, 가치관, 준거틀)의 경중(經重)에 따라서 행동의 양식이 결정된다. 인간의 현재적인 모습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이해한다는 것은 역시 현재의 현상적이고 본질적인 모습과 이상향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적인 실재의 가치는 실로 보잘것 없는 것이다. “10갤론이 넘는 물과 한 개의 닭장을 칠할 수 있는 석회, 2~3회 정도의 사진을 조명할 수 있는 마그네슘, 한끼의 식사를 하기에 충분한 소금과 세타스의 성냥갑에 담길 양인 인과 세줄의 비누를 만들기에 충분한 지방, 집안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양의 암모니아, 한개의 못을 만들 수 있는 철과 차 한잔에 넣을 수 있는 설탕의 가치는 얼마 안되는 것이다.”(1980년 기준 165파운드)

인간의 가치를 제외한 생물학적인 요소는 미비한 가치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인간의 자연적인 물질의 가치를 인간에게 도용할 때에는 참으로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따라서 인간의 현재적인 실존의 물음을 다시 제기함과 동시에 정말로 인간의 가치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몰이해를 창출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은 마치 넓은 광야에 혼자서 있는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혼자 살아간다. 자신의 병고의 현상이나 심리적인 고독, 그리고 죽음 앞에선 부모의 절대적인 사랑도 자식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는 단 혼자의 실재적인 모습을 겪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본연의 물음 앞에 단독자임은 자명한 것이다.

대체로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의 부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간 본연의 내부적인 모습이며 또 하나는 인간 환경의 외부적인 모습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든다. 인간은 항상 자신과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어 자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만족이 없이는 그 어떤 외부적인 요인도 결코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염두하면서 키에르케고르(Sӧren Kierkegaard)의 사상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는 그 무엇과 각 개인과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실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Platon과 Hegel에 이르기까지 사변적인 존재론의 확산은 인간이란 오직 영원과 무한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고, 그의 진리는 오직 보편적인 즉 객관적인 본질성과의 일치에서만 도달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본질적으로 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아는 인간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하나의 통일된 가치체계를 가짐으로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를 무한화함으로서 자아를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하는데 있지 않으면 안된다. 자아가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자아는 절망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곧 절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성의 한계”에서 오는 것과 또한 “무한성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 있다. “유한성의 한계”라 함은 인간의 공간적인 제약과 시간적인 한계 그리고 능력의 한계를 인식함에서 오는 제한적인 영역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며, “무한성의 한계”라 함은 인간의 편협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간 이상의 가치(신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며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만 인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의 위치는 다분히 “중간자”의 단계에 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상황에서의 실존적인 인간의 위치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소외를 갖게 된다.

사회나 국가 속에서의 개인은 외소하며 고독하다는 것인데 다음의 글을 통해 실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철학함은 모든 존재 자체의 물음을 찾는데 있으며, 이는 존재론적인 의도나 법적인 회의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존재의 균열’(Zerissenheit des Seins)에 직면하여 가능한 실존이 당황하고 파산된 상태에서 제기된다.” 또한 그에게 그 자신이 내 맡겨진 가능한 존재이다. 현존재는 그 기분 안에서 제기될 수 없으며 더 이상 배후를 캐어 볼 수 없으며 다른 것에서도 도출할 수 없는 현사실인 그 자신에게로 지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사실은 그것이 있을 때에 단적으로 있는 것이며 이것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용어상 ‘이 존재자가 그 자신의 거기에 있음에 내던져져 있음’이며, 그것도 그 존재자가 세계내 존재로서 자신의 거기에를 존재하는 그런 내던져져 있음으로 파악한다.”

존재의 균열과 내던져 있음의 의미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인격성의 상실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실존 속에서 인간은 항상 ‘독아(獨俄)적’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적인 문제를 항상 자신의 문제로 자각함으로서 다음과 같은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른바 훌륭한 객관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자. 또는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하자. 그러나 이것이 어쨌단 말인가? 남의 구경거리를 제시하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객관적인 것은 그때 그때마다 결코 본래적인 내 것이 아니다.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서로 얽히어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을 통하여 내가 신적인 것에 들러 붙을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전 전세계가 무너져 버리더라도 내가 그것을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나는 갈망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추구하 리라”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인간의 불안과 부조리, 구조악 등의 모든 말들은 인간의 개인적인 가치를 하락시킴과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인 현실의 문제 등에 직시하는 현안의 문제이므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어떤 심오한 진리를 발견하였다 해도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단독자는 본래적으로 심원적이며 실존적인 문제에 처해있는 실제적인 현상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살아 숨쉬는 동안 따라다니는 ‘화두’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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